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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편지] 영웅 만들기

얼마 전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 기념으로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와 함께 의회에 참석했다. 그때 98세 우크라이나 출신의 퇴역 군인이 소개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는 영웅이라는 이유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나치 친위대 ‘갈리시아’의 제1 우크라이나 사단 소속 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캐나다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 트뤼도 총리는 공식 사과했고, 하원 의장 안토니 로타는 사임했다. 러시아는 캐나다를 맹비난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갈리시아 사단에 자원한 이들은 고국을 소련의 끔찍한 지배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활동한 전쟁 영웅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복잡한 지정학적인 세력에 얽매인 피해자라는 사실은 한국인으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원전 6세기 말 아테네의 아고라에 세워진 조각상 ‘폭군 살해자들(Tyrannicides)’이 떠올랐다.   이는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재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젊은 청년 하르모디우스와 그의 연상 연인인 아리스토게이톤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모습이다. 이들은 아테네의 폭군을 암살한 주인공으로, 민주주의를 일으킨 영웅으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기원전 5세기의 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이들 두 명의 영웅담을 개인적인 명분의 암살이라고 지적한다. 하르모디우스가 폭군의 아우 히파르코스에게 성희롱당한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사건이며, 폭군 히피아스가 아닌 그 아우를 암살했다고 상기시킨다. 새로운 민주정치 체제를 도입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고, 이 두 인물이 퍼펙트한 모델로서 부상했던 것이다. 인류사에서 영웅이 만들어지고 취소되는 수많은 사례의 원천이라 볼 수 있겠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영웅 우크라이나 사단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출신

2023-10-13

[열린 광장] 전쟁을 고발하는 예술인들

 지금 인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하루하루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세계미술사에서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기록한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스페인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전쟁의 참상(Los desastres de la Guerra)’이라는 판화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고야는 1808년부터 1814년까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입한 전쟁에서 목격한 참상을 82점의 판화로 제작했고, 인간 본성에 내재한 광기와 잔인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사지가 잘려 나무에 매달린 군사와 적군에 처참하게 희생당하는 민간인의 비극을 기록한 이 판화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전쟁이 초래한 인간성의 말살과 비극에 대해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나치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보고, 이를 거의 폭 8m, 높이 3m50㎝에 이르는 대형 회화 작품으로 고발했다. 피카소는 폭격으로 다치고 절망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을 흑백 톤으로 제한된 어두운 컬러와 특유의 큐비즘 기법으로 표현했다. 피카소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게르니카로’로, 이 또한 전쟁의 종식에 대한 인류의 염원을 강한 시각적 언어로 전달한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화합을 소망하며 인류의 휴머니즘이 나아갈 길에 관해 이야기하는 현대미술 작가로는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잘 알려진 뱅크시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는 대포에서 포탄 대신에 꽃들이 쏟아져 나오거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로막은 장벽에 벽이 뚫리고 아이가 모래 장난하는 그라피티를 그려서 두 나라의 화해를 염원하기도 했다.  또 시리아 내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탈출하는 난민을 구하기 위해 직접 선박을 구입하여 이들의 생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통역이 필요 없는 만국 공용어 비슷하다. 널리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는 단순히 시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전 세계인의 참여를 끌어낸다. 예컨대 전쟁으로 인해 파손 위험에 놓인 우크라이나 유물들에 대한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저장하는 작업이 여러 나라의 박물관 관계자들의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 우크라이나 파빌리온을 지원하는 움직임에 세계의 예술인들이 동참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출신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세계적인 미술 기관들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다.   또 많은 예술가는 우크라이나 돕기 전시에 작품을 기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지지를 상징하는 예술가들의 그림들도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로 판매되고 있다. 수익금은 물론 피란민에게 전달된다.   음악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우크라이나 지하 벙커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아 본다렌코의 연주에 응답하며 전 세계 바이올리니스트 94명이 줌(Zoom)으로 참여한 1분 30초 영상은 열흘 만에 32만여 명이 감상했다. 러시아의 무차별한 침공을 비판하고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에 세계인의 참여를 끌어냈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 1804)는 1795년 집필한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은 악이며 영구평화야말로 인류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는 세계인의 연대를 통해서만 지켜낼 수 있다고 말했다.     소리치지 않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 강하고, 인류의 마음에 경각심을 심어주고,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언어로 호소하는 예술가들의 연대에 동참하며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해본다. 최선희 /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열린 광장 예술인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 출신 우크라이나 유물들

2022-03-23

[J네트워크] 그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올림픽은 한때 아마추어의 잔치였다. 대부분의 종목이 프로선수 출전을 금지했다. 올림픽 상업화의 효시인 1984년 LA올림픽부터 프로선수 출전 제한이 완화됐다. 그런가 하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는 남자축구에 출전 선수 나이 제한(23세 이하)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1988년 서울올림픽은 남자축구에서 나이 및 프로선수 출전 제한이 없었던 유일한 대회다. 그렇기에 대회 출전국과 선수의 면면이 월드컵과 맞먹을 정도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축구에는 16개국이 출전했다. 조별 리그에서 한국은 미국·소련·아르헨티나와 함께 C조에 속했다. 한국은 2무 1패, 조 3위로 탈락했다. 금메달은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2-1로 꺾은 소련이 차지했다.     당시 소련팀을 이끈 지도자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다. 외국인 최초로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한국이 세계 축구에 눈뜨게 한 그 감독이다. 그는 1943년 키이우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선수 시절에도 우크라이나 명문클럽 FC 디나모 키이우에서 활약했다.   소련 축구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올레흐 블로힌과 이호르 벨라노우(러시아 발음 이고리 벨라노프)다. 두 선수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블로힌은 1952년 키이우, 벨라노우는 1960년 오데사에서 각각 태어났다. 둘 다 선수 시절 디나모 키이우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 ‘득점 기계’로 불린 안드리 셰우첸코와 함께 ‘발롱도르’를 수상한 세 명의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이들 외에 발롱도르를 받은 소련(러시아 포함) 선수는 ‘거미손’ 레프 야신뿐이다.   여자체조의 전설 라리사 라티니나는 1956년 멜버른, 60년 로마, 64년 도쿄올림픽에 걸쳐 금 9개, 은 5개, 동 4개 등 모두 18개의 메달을 따냈다. 그는 1934년 헤르손에서 태어났고 키이우에서 자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세르히(러시아 발음 세르게이) 붑카는 장대높이뛰기에서 인간 최초로 6m를 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에 금메달을 안겼다. 붑카는 1963년 루한시크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현재 이들 중 일부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일부는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다. 한때 이들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출신 동료와 한 팀을 이뤄 호흡을 맞췄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지난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이들의 후예인 수많은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자신들이 뛰던 경기장을 떠나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중 일부는 안타까운 전사 소식까지 전해졌다.     하루빨리 이 미친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보내야 한다. 그곳이 바로 그들 자리다. 장혜수 / 한국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J네트워크 경기장 우크라이나 선수들 우크라이나 출신 서울올림픽 남자축구

2022-03-13

[카운터어택] 그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올림픽은 한때 아마추어의 잔치였다. 대부분의 종목이 프로선수 출전을 금지했다. 올림픽 상업화의 효시인 1984년 LA올림픽부터 프로선수 출전 제한이 완화됐다. 그런가 하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는 남자축구에 출전 선수 나이 제한(23세 이하)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1988년 서울올림픽은 남자축구에서 나이 및 프로선수 출전 제한이 없었던 유일한 대회다. 그렇기에 대회 출전국과 선수의 면면이 월드컵과 맞먹을 정도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축구에는 16개국이 출전했다. 조별 리그에서 한국은 미국·소련·아르헨티나와 함께 C조에 속했다. 한국은 2무 1패, 조 3위로 탈락했다. 금메달은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2-1로 꺾은 소련이 차지했다. 당시 소련팀을 이끈 지도자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다. 외국인 최초로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한국이 세계 축구에 눈뜨게 한 그 감독이다. 그는 1943년 키이우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선수 시절에도 우크라이나 명문클럽 FC 디나모 키이우에서 활약했다.   소련 축구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올레흐 블로힌과 이호르 벨라노우(러시아 발음 이고리 벨라노프)다. 두 선수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블로힌은 1952년 키이우, 벨라노우는 1960년 오데사에서 각각 태어났다. 둘 다 선수 시절 디나모 키이우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 ‘득점 기계’로 불린 안드리 셰우첸코와 함께 ‘발롱도르’를 수상한 세 명의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이들 외에 발롱도르를 받은 소련(러시아 포함) 선수는 ‘거미손’ 레프 야신뿐이다.   여자체조의 전설 라리사 라티니나는 1956년 멜버른, 60년 로마, 64년 도쿄올림픽에 걸쳐 금 9개, 은 5개, 동 4개 등 모두 18개의 메달을 따냈다. 그는 1934년 헤르손에서 태어났고 키이우에서 자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세르히(러시아 발음 세르게이) 붑카는 장대높이뛰기에서 인간 최초로 6m를 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에 금메달을 안겼다. 붑카는 1963년 루한시크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현재 이들 중 일부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일부는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다. 한때 이들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출신 동료와 한 팀을 이뤄 호흡을 맞췄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지난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이들의 후예인 수많은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자신들이 뛰던 경기장을 떠나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중 일부는 안타까운 전사 소식까지 전해졌다. 하루빨리 이 미친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보내야 한다. 그곳이 바로 그들 자리다. 장혜수 / 한국 콘텐트제작에디터카운터어택 경기장 우크라이나 선수들 우크라이나 출신 서울올림픽 남자축구

2022-03-13

러 “곧 수도 함락” 항복 압박…우크라군 결사 항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하며 진군을 계속하고 있다. 수도 키예프가 수일 내로 함락될 수 있다는 예측과 함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CNN은 25일 정보당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수도 키예프가 나흘 내로 점령당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 평가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보도했다.   이날 셀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크라이나가 저항을 끝내고 무기를 내려놓으면 언제든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현재 러시아군의 키예프 장악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의회 브리핑에서 국방 당국 관계자는 “러시아 군이 수도 키예프 20마일 이내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예프 시장은 “시 북쪽 지역에 있는 발전소 인근에서 3~5분 간격으로 다섯 차례 폭발음이 들렸다”며 “러시아군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시내 모든 다리를 보호하고 특별 통제하고 있다. 시내 전략 시설에는 검문소를 설치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목격자들의 말을 통해 “키예프 부근에서 포성이 들리고 도시 서쪽 지역에서는 격렬한 총성이 났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키예프를 향해 밀고 들어오자 우크라이나군도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키예프 대통령궁 앞에서 총리, 합참의장, 고위 보좌관 등과 함께 선 채 “모두가 여기에 있다. 군대도 시민도 여기에 있다”며 결사항전 의지를 표시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언론에 우크라이나 전황을 전하면서 “러시아가 예상한 것보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더 크다고 평가한다”면서 우크라이나군의 지휘 및 통제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황 발표는 차이가 있다.   이고리 코나셴코프 러시아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군이 키예프 외곽 호스토멜 공항으로 공수부대를 성공적으로 침투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면서 “공항 장악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원 200명 이상이 사살됐으며 러시아군 손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말랴르 우크라이나 국방차관은 이날 “전투 과정에서 러시아 군인 2800명이 숨지고, 러시아군 탱크 80대와 장갑차량 516대, 전투기 10대, 헬기 7대도 파괴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양측의 협상 시도도 있었다.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5일 오후 “우크라이나 측이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협상하는 구상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 뒤이어 회담장을 (폴란드) 바르샤바로 하자고 역제안을 한 뒤 연락을 끊었다”고 말했다.   세르게이 니키로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대변인은 곧바로 “우리가 회담을 거부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싶다”며 “우크라이나는 평화와 정전을 놓고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25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 화상 회의를 열었다. 유럽평의회는 이날 러시아를 회원국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우크라이나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러시아 침공 이후 자국 내 인도주의적 상황에 대해 긴급회의를 요청한 바 있다. 장열 기자사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사태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출신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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